
고모 집에 들렀다가 같은 이야기를 세 번째 반복하시는 걸 들었을 때, 저는 솔직히 처음에는 그냥 넘겼습니다. 나이 드시면 그럴 수도 있지 싶었거든요. 그런데 "고모, 아까 말씀하셨는데요"라고 했을 때 고모가 민망해하시던 그 표정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치매의 초기 징후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떨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고모를 지켜보면서 느낀 건, 단순한 건망증과 치매 초기 증상은 결이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밥을 먹으러 갔는데 뭘 먹었는지 기억 못 하는 건 나이 든 분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건망증 수준입니다. 그런데 치매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기억력장애는 차원이 다릅니다. 밥을 먹으러 갔다는 경험 자체를 통째로 잊어버리는 것이죠. 경험의 일부가 아니라 경험 전체가 사라지는 겁니다.
여기서 인지기능이란 기억력뿐 아니라 시간·장소·사람을 알아보는 지남력, 언어 이해 능력, 시공간 능력, 그리고 일상적인 판단력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치매는 이 인지기능이 후천적으로 전반적으로 저하되면서 일상생활에 상당한 지장을 주는 상태를 말합니다. 단순히 기억이 나쁜 게 아니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종합적인 뇌 기능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중앙치매센터 자료에 따르면 국내 65세 이상 노인 10명 중 1명 이상이 치매를 앓고 있으며, 이 숫자는 고령화와 함께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출처: 중앙치매센터).
치매의 단계별 증상
치매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습니다. 특히 알츠하이머형 치매의 경우, 수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초기에는 가족들도 쉽게 알아채지 못합니다. 제 경험상 이게 가장 무서운 부분이었습니다. 고모가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는데도, 가족들은 "좀 건망증이 심해지셨나" 하고 넘기고 있었으니까요.
초기, 중기, 말기 단계별로 나타나는 증상은 뚜렷하게 다릅니다.
- 초기(발병 후 약 1~3년): 최근 일을 잘 기억 못 하고, 같은 말을 반복하며,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아 "이거, 그거, 저거"로 대체하는 일이 잦아집니다. 아직 혼자 생활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중요한 약속을 잊거나 매사 귀찮아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 중기(발병 후 약 2~10년): 누가 봐도 이상하다고 느낄 만큼 증상이 뚜렷해집니다. 옛날 일도 손상되고, 장소나 시간 감각을 잃는 지남력 장애가 생깁니다. 혼자 외출했다가 길을 잃는 일이 생기며, 부분적인 돌봄이 필요해집니다.
- 말기(발병 후 약 8~12년):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고,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거나 대화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삼키는 기능까지 저하되어 신체 전반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가 됩니다.
고모 누나에게서 "이제는 외출할 때 문을 잠그고 나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중기에 접어들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습니다. 빨리 병원에 가보시라고 말씀드리고 나서야, 저는 우리 아버지 걱정이 물밀 듯 밀려왔습니다.
치매약물 치료, 빠를수록 좋은 것일까
치매 진단을 받으면 약을 빨리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알아보니, 약물 선택에는 단계에 맞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현재 사용되는 치매약물은 크게 두 계통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아세틸콜린분해효소억제제입니다. 여기서 아세틸콜린분해효소억제제란 뇌에서 인지기능에 관여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이 빠르게 분해되지 않도록 억제해, 뇌 기능을 최대한 유지시키는 약물입니다. 다만 오심, 구토, 설사 같은 소화기계 부작용이 상대적으로 흔하게 나타나고, 드물게 부정맥이나 실신이 생길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NMDA 수용체 길항제입니다. NMDA 수용체 길항제란 뇌에서 글루타메이트라는 신경물질이 과도하게 작용하면 신경세포가 파괴되는데, 이를 막아 뇌세포 손상을 늦추고 학습·기억 기능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약물입니다. 두 계통을 병합해서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약물 치료에서 제가 인상 깊었던 대목은 "아무리 비싼 코트도 여름엔 입고 나갈 수 없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치매약도 단계에 맞게 써야 효과가 있고, 단계를 무시한 채 빨리 쓴다고 좋은 게 아니라는 뜻이죠. 보호자 입장에서는 약물 부작용 여부를 꼼꼼히 관찰하고 의료진과 충분히 소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치매는 예방과 조기 발견이 핵심이다
치매는 나이가 들면 어느 정도 피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이 부분에서 생각이 좀 다릅니다. 실제로 치매의 원인 중 일부는 치료 가능한 경우도 있습니다. 뇌종양, 심한 우울증, 갑상선 기능 이상, 특정 약물 부작용, 영양 결핍 등이 원인일 때는 해당 문제를 치료하면 인지기능이 회복되는 사례도 있습니다. 치매 환자 100명 중 최대 10명 정도는 이런 '치료 가능한 치매'에 해당할 수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고모 일을 겪고 나서 저는 아버지를 모시고 치매 검사를 받으러 갔습니다. 다행히 문제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그래도 안심이 안 돼서 인지기능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건강보조제도 챙겨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기도 하는데, 저는 무엇이든 관리를 시작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병식(病識)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병식이란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식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치매 초기에는 이 병식이 흐려지기 때문에 환자 본인이 "나 좀 이상한 것 같다"고 자발적으로 병원을 찾는 경우가 드뭅니다. 결국 가족이 먼저 변화를 알아채고 데려가는 것이 조기 발견의 핵심입니다. 보건복지부에서도 60세 이상이라면 치매안심센터를 통해 무료 선별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출처: 보건복지부).
고모를 보면서 저도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늘리고, 뇌에 자극이 되는 활동을 의식적으로 찾게 됐습니다. 치매는 이미 진행된 뒤에 막을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이라면, 주변 어르신의 작은 변화에 한 번쯤 더 주의 깊게 눈길을 주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걱정이 된다면, 가까운 치매안심센터에 먼저 전화 한 통을 해보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작이 됩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의학 조언이 아닙니다. 치매가 의심된다면 반드시 전문 의료기관을 방문하시기 바랍니다.